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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 스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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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2.1. 데뷔 전[편집]
바사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드라마 입문 수업에서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한 대목을 실감나게 읽는 것을 눈여겨 본 클린트 앳킨슨 교수가 그녀를 배서 대학이 제작하는 연극 《줄리 아씨》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다.
메릴 스트립은 1969년 바사 대학교 재학 중 연극 <Miss Julie>에 출연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다 메릴 스트립이 예일대학교 연극대학원 재학 시절 당시 Yale School of Drama에서 로버트 루이스(Robert Lewis)[5] 에게서 메소드 연기 교육을 받았다.
2.2. 1970년대: 주목받는 신예 배우[편집]
1971년에 《세비야의 플레이보이》라는 작품[6] 으로 데뷔했고 1976년 《면이 가득 든 27개의 수레》에서의 연기로 토니상 후보에 오른다. 1977년에는 TV 스포츠 드라마인 《치명적인 계절》과 영화《줄리아》[7] 에 출연하며 대중 매체로 들어섰다.
메릴의 필모그래피에 중요한 초석이 된 작품은 1978년에 나온 영화 《디어 헌터》로, 이를 통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에 최초로 지명되었다. 《디어 헌터》이후 NBC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에 출연하며 에미상 미니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8] 이때를 기점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다.
1979년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스트립의 초기 필모그래피에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더스틴 호프먼과의 열연으로 그녀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9]
2.3. 1980년대: 본격적인 도약[편집]
1983년《실크우드》에서 실존인물인 사회운동가 캐런 실크우드[11] 를 연기하며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다.
1985년,《프렌티》를 촬영하던 중 죽다 살아난 일화가 있다. 튀니지에서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던 비행기가 3만 피트 상공에서 엔진 한 쪽이 터져 버리고 다른 하나는 멈춰버렸다. 다행히 비행기는 프랑스 니스에 비상 착륙에 성공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출연하여 할리우드 최고의 남자배우인 로버트 레드퍼드와 호흡을 맞추기도 하였다. 이 영화로 5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그때까지 메릴이 출연한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 수를 기록하며 상업적 대박을 쳤고,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도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무려 7개 부문을 수상했다.
1988년에는《어둠 속의 외침》에서 실존인물 린디 체임벌린[12] 을 연기하며 호주의 아카데미상 격인 AACTA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9년, 40살이 된 메릴은 그간 쌓아온 진중한 이미지의 캐릭터와 달리 밝고 유쾌한 코미디 영화《그녀는 악마》와 《헐리웃 스토리》에 연달아 출연했다. 메릴 스트립은 《헐리웃 스토리》에서 연기한 '수전 베일'이 자신의 본래 모습과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2.4. 1990년대: 믿고 보는 중년 배우[편집]
1994년작 《리버 와일드》 촬영에서도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급류에서 한창 촬영하다 고무보트에서 튕겨져 나갔는데, 다행히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 물 위로 떠올랐다. 참고로 《리버 와일드》에서의 액션 연기를 위해 6개월간 매일 3시간 반씩, 매일 900칼로리씩 태우며 조리되지 않은 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2.5. 21세기: 전설적인 대배우[편집]
2001년에는 연극 《갈매기》 리바이벌 공연으로 20년 만에 연극무대에 다시 올랐다. 2001년 9월에는 9.11 테러를 지켜보고 그 2주 뒤에 어머니 메리 스트립의 장례를 치르는 등[13]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으나, 신예 감독 스파이크 존즈의 실험적 블랙코미디《어댑테이션》에 출연하며 13번째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면서 캐서린 햅번의 아카데미상 최다 후보 기록인 12회를 경신한다. 당시 쉰 살이던 메릴은 《어댑테이션》의 수전 올리언 역을 통해 세련된 이미지를 새로이 얻게 되었다며 스파이크 존즈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2003년에는 6,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HBO 드라마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1인 4역을 소화했다. HIV바이러스를 앓고 있는 80년대 성소수자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원작을 토대로한 HBO 6부작 미니시리즈이다. 유료 프리미엄 케이블 방송국인 HBO의 막강한 섭외력으로 마이크 니콜스가 연출을 맡았고, 메릴을 포함한 걸출한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하며[14] 그들의 신들린 연기대결과 배우들 각자 1인 2역에서 심지어 3역까지 달하는 개성 넘치는 연기력을 보여준다.[15] 드라마는 이듬해, 에미상과 골든글러브, SAG 등 각종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작품상 등 미니시리즈 부분에 노미네이트와 수상을 하며 평단의 호평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메릴도 이를 통해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6년엔 앤 해서웨이와 함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출연하였다. 젊은 세대들에겐 아마 이 영화가 메릴 스트립하면 가장 떠오르는 작품일 것이다. 전설적인 패션 편집장인 "미란다" 역을 맡았으며 소름돋는 연기력을 보여줬다.[16] 얼마나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줬는지 상업영화임에도 불구하고 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된다. 앤 해서웨이는 같이 연기하면서 메릴 스트립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눈부신 미란다의 모습이 보인다.
악어 가죽으로 된 2,000달러짜리 '마놀로' 구두, '샤넬' 재킷, 완벽한 머리 모양, 기가 막힌 '해리 윈스턴' 귀걸이.
미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처음으로 그녀의 정면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멋지고 스타일은 완벽하게 조화롭다. 목에는 하얀 '에르메스' 스카프가 감겨 있다.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100미터 밖에서도 그녀를 알아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일지라도 미란다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천하의 미란다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중 '미란다 프리슬리‘의 등장씬 각본
2008년엔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맘마미아》에 출연했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40대 초반의 주인공 '도나' 役을 맡아 열연했다.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연기와 탁월한 노래 실력을 뽐내며 제작비의 10배 이상의 흥행 수익을 거두는 초대박을 터트린다.
2008년엔 필립 시모어 호프먼, 에이미 애덤스와 《다우트》에 출연하였고, 배우들의 열연으로 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된다. 이듬해엔 《줄리 & 줄리아》에 출연하여 다시한번 에이미 애덤스와 호흡을 맞추기도 하였다. 이 영화로 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2012년엔 《철의 여인》에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 역을 맡으며 실제 대처 총리인 줄 착각하게 만들 만한 메소드 연기를 선보이며 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7번째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첫번째 여우주연상 수상 29년 뒤 2번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2014년에는 뮤지컬 장르 영화로 유명한 롭 마샬 감독이 연출을 맡고 조니 뎁, 에밀리 블런트, 애나 켄드릭 등이 출연한《숲속으로》에 참여하여 뮤지컬 형식의 연기를 하였다. 이 영화로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이때 수상한 《보이후드》의 퍼트리샤 아켓이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여성의 임금 차별 문제를 얘기하자 객석에 있던 메릴이 격하게 호응해주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7년 1월에는 제74회 골든글로브 공로상을 수상했는데[17] 수상 소감이 상당히 화제가 되었다.#
할리우드 외신 기자협회 여러분 감사합니다. 아까 휴 로리가 하던 말을 이어서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미국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할리우드, 외국인, 기자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누구고 대체 할리우드가 뭔가요? 다른 지역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무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뉴저지에서 태어났고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이올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농장에서 태어나서 로드아일랜드의 센트럴폴즈로 이주했고요. 사라 폴슨은 플로리다에서 태어나 싱글맘과 함께 브루클린에서 자랐습니다. 사라 제시카 파커는 오하이오 출신으로 7~8명의 형제가 있었죠. 에이미 아담스는 이탈리아의 비첸자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탈리 포트만은 예루살렘 출생이고요. 이들의 출생증명서는 어딨습니까?[18]
아름다운 루스 네가는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아니 제가 알기로 아일랜드에서 자랐을 거예요. 그리고 버지니아 출신의 소녀를 연기해 오늘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보통 좋은 사람들이 그렇듯 라이언 고슬링은 캐나다 사람이고요. 데브 파텔은 케냐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자랐고 태즈메이니아에서 자란 인도인을 연기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할리우드는 외부인과 외국인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모두 쫓아낸다면 우리는 평생 미식축구와 격투기만 보면서 살아야 할 겁니다. 그것들은 예술이 아닙니다. (기립박수)말할 시간에 3초밖에 안 남아서 계속할게요. 배우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 관객들이 그 사람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도록 하는 겁니다. 올해는 그런 훌륭한 연기들이 참 많았습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고 인간적인 연기들이요. 하지만 저를 깜짝 놀라게 한 연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연기는 제 가슴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좋은 연기여서가 아닙니다.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효과적이었고 제 역할을 했죠. 일부 관객들을 웃게 했고 그 진면목을 드러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자리에 오르길 자처하는 사람이 장애인 기자를 따라했던 그 순간입니다.[19]
그에 비해 특권도, 권력도, 맞서 싸울 능력도 모자랐는데 말입니다.저는 그걸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요. 이처럼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를 공적 자리에 서는 사람이 행할 때, 권력이 있는 사람이 행할 때 그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승인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무례함은 무례함을 낳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그리고 권력자가 다른 사람을 괴롭힐 때 우리는 모두 패배합니다.
기자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책임을 물을 고결한 기자들이 필요합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를 비판할 기자들이요. (기립박수) 그게 우리의 선조들이 헌법에 언론의 자유를 새긴 이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자로 유명한 할리우드 외신 기자협회와 헐리우드의 명사들에게 요청합니다. 저와 함께 언론인보호위원회를 후원해주세요. 우리는 앞으로 그들이 필요합니다. 그들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우리가 필요할 겁니다.
한 가지 더요. 한 번은 촬영장에서 괜한 불평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촬영이 저녁까지 지연됐나 그랬을 거예요. 토미 리 존스가 말하더군요. 메릴, 배우로 산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지 않아? 맞아요. 우리가 가진 특권과 또 의무를 서로에게 상기시켜 줍시다. 공감을 전할 의무요. 오늘 할리우드가 기념하는 우리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합시다. 저의.. 제가 사랑하는 친구이자 최근 세상을 떠난 레아 공주가 말했습니다.
"아픈 마음을 간직하고 예술에 쏟아부어라"
감사합니다. 할리우드 외신 기자협회 여러분.
거의 나들이 가는 수준으로 매년 시상식 후보는 물론 상까지 받아가는 메릴이지만 이 자리에서만큼 평소답지 않게 진중하면서도 긴장한 상태였는데, 스트립의 이러한 무겁고 날카로운 연설은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 화제가 되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도널드 트럼프를 디스한 것이 임팩트가 컸는지 트럼프는 스트립의 수상 소감을 보고 트위터에 ''가장 과대평가 받는 배우''라고 맞디스를 했다.출처[20]
특히 '무례함은 무례함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라는 말은, 현 시국을 가장 긴밀하게 관통하는 뼈 아픈 발언임과 동시에 소수자 혐오를 반대하고, 예술의 다양성을 촉구하던 스트립의 행보와 맞아 떨어지는 품격있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어느정도 발언의 자유가 보장된 헐리우드라지만 이렇게 공식적인 석상에서, 그것도 공로를 우수히 여겨 상을 주는 공로상 수상 자리에서 위와 같은 연설을 한 스트립의 용기는 세계적으로 큰 찬사를 받았다.
2019년, HBO의 TV시리즈 《빅 리틀 라이즈》 시즌2에 출연했다. 제작자이자 주연배우인 리즈 위더스푼에 의하면 시즌 1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며 시즌 2에 대한 압박감이 커져 오자 "그냥 메릴을 데려오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러한 선구안 덕분에 드라마는 시즌 2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3. 위상[편집]
1970년대부터 명연기로 주목받았으며,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2회, 여우조연상 1회를 수상했다.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 21회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있는 명실상부 할리우드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미국 영화 역사를 통틀어 배우 중 그녀에 비견될 만한 커리어를 쌓은 사람은 할리우드 초중기의 전설적 배우였던 캐서린 헵번이 유일하다. 캐서립 헵번은 아카데미에 12번 노미네이트되어 여우주연상을 4회 수상하였다.[22] 현재 아카데미의 여배우 계보는 캐서린 헵번-메릴 스트립-조디 포스터-케이트 블란쳇, 줄리앤 무어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러한 위상에 관해 할리우드 업계의 잘못이라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샤론 스톤은 비올라 데이비스, 엠마 톰슨, 주디 데이비스, 올리비아 콜먼과 케이트 윈슬렛 등을 언급하며 "할리우드에는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중년의 남배우들이 있다. 각자의 개성을 갖고 활동한다. 그러나 여배우들은 그렇지 않다. 중년 여배우에는 오직 메릴만 있는 것처럼 몰아간다"며 일종의 성차별이라고 이야기했다. #
3.1. 아카데미 시상식 기록[편집]
그 외에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선 31번 노미네이트 되어서 8번 수상했고 비평가상과 그래미상 등 각종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되고 수상했다. 해외 영화제에서도 인정받아서 베를린 영화제에서 3번 수상했고[25] 칸 영화제에서도 한번 수상했다. 아카데미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배우 본인은 난 아카데미에서 가장 많이 패배한 여배우라고 농담 소재로 써먹는다(...) 어찌보면 활발한 활동+뛰어난 연기력+한 번 받은 배우는 잘 안 주는 아카데미 상의 특징 등이 합쳐져서 나온 비극 아닌 비극.
4. 출연작[편집]
4.1. 영화[편집]
4.2. TV[편집]
5. 사생활[편집]
- 데뷔 초 대부 시리즈의 프레도 콜레오네로 유명한 배우 존 카제일과 연인 사이로 유명했다. 1976년 연극무대에서 처음 만난 둘은 이후 카제일이 골수암 진단[32] 을 받았음에도 약 3년간 뉴욕에서 같이 살았다. 두 사람은 이후 영화 《디어 헌터》에 같이 출연하게 되었는데, 스트립은 극 중 역할에 대해 다소 의구심이 있었으나 몸이 아픈 연인을 옆에서 지켜준다는 사실에 먼저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감독인 마이클 치미노와 각본가와의 협의 하에 폐암 말기까지 겹쳐 극도로 허약해진 카제일의 촬영을 먼저 할수 있도록 재조정했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촬영 직후 카제일은 골수암으로 78년 3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스트립은 죽을 때까지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고 한다. 또한, 2009년에 제작된 단편 다큐멘터리(I Knew It Was You[33] : Rediscovering John Cazale)의 제작과 재정 지원에 참여하였고, 다큐에는 직접 출연해서 그를 회고했다.
- 현 남편 돈 거머[34] 와는 1978년 9월에 결혼했다. 이후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40년 넘게 해로하며 4명의 자식을 키웠다. 4명 모두 메릴 스트립과 판박이이며 딸들은 모두 모델과 배우로 활동 중이며 아들은 가수로 활동 중이다. 이혼이나 스캔들이 일상인 할리우드에서 보기 드문 굉장히 깨끗하고 모범적인 사례.[35] 게다가 영화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활동 등에서 모범적이다. 20세기 폭스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의상 전부를 자선단체에 기부하자, 이 영화로 받은 골든 글로브 시상식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에서 폭스사의 기부는 품격 있는 행동이었다며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이렇게 뛰어난 연기와 자신의 직업과 가정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등에서 언제나 열정적이고 모범적인 메릴 스트립을 이 시대의 수많은 여배우들은 자신들의 롤모델[36] 로 꼽고 있다.
6. 여담[편집]
- 미국 태생의 미국 배우 중에는 드물게 영국식 발음 그중에서도 RP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37] 그래서 영화 철의 여인에서 마거릿 대처를 대처에 빙의된 수준으로 연기했다. 또한 연기를 위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들과 억양들까지 익혔다. 억양을 중시하는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할리우드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쳐 다양한 언어들에 대한 코치 산업까지 생겨났다.
- 1979년작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함께 출연했던 선배인 더스틴 호프만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 도중 메소드 연기를 가장한 메릴 스트립을 몇 대 때리고 결정적으로 메릴 스트립에게 알려주지도 않은 채로 와인잔을 날리는 애드립을 시전해서 완전히 감정이 상한 듯. 근데 메릴 스트립 본인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메소드 연기를 했다. 참고로 더스틴 호프만은 2018년 미투 운동의 대상자로 지목된다.
- 1994년 11월 6일 방영된 심슨 가족 시즌6 7번째 에피소드 '바트의 여자 친구'(Bart's Girlfriend) 편에 목소리 출연했다. 배역은 러브조이 목사의 딸 제시카. 당시 메릴이 더빙 녹음실에 들어오자 바트 심슨의 성우 낸시 카트라이트가 주눅이 들어 메릴에게 선뜻 사인해달라고 말하지 못했는데, 메릴이 카트라이트에게 먼저 사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 1999년작 《뮤직 오브 하트》 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로베르타 과스파리를 연기하기 위해, 1998년 7월 중순부터 8월까지 6주 동안 하루 6시간씩 바이올린을 배웠다. 추가로 영화 속 클라이막스인 카네기홀 공연 장면을 위해 1999년 1월까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 2004년 미국 대선 중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 vs. 민주당 존 케리 상원의원에서 존 케리를 지지했다. 2004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동성애 결혼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거나[38]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파병을 맹비난 하는 등 강한 정치적 견해를 드러냈다.
- 메릴 스트립의 팬들은 자칭 Streeper라고 한다.
- 코미디언 조앤 리버스의 팬이다. 조앤 리버스 스타일을 흉내낸 농담을 적어 팬레터를 보낸 적이 있다. 스트립의 팬이었던 리버스는 이를 큰 영광으로 여겼다.